015b

내 삶의 민중가요 (1) 015B의 수필과 자동차

노래는 시대를 반영한다. 아저씨가 되고는 옛 노래를 들으면서 과거를 떠올린다. 당시를 회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를 노래가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시절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거나, 혹은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면 ‘민중가요’라고 생각한다.

1992년은 엄청난 해였다. 태진아의 ‘거울도 안 보는 여자’, ‘노란 손수건’ 따위를 따라 부르던 내 눈 앞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타났다. TV 앞에서 ‘난 알아요’ 안무를 따라 하며 방방 뛰던 아이가 국민학교 입학한 해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1학년을 마치고 교과서를 받을 때즘 서태지는 이미 우상으로 자리잡았다.

서태지 앞에서는 겜보이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즈음 서태지와 아이들이 갑자기 TV에서 사라졌다. 다음 음반 작업을 위해 휴식기를 갖겠다는 거였는데 소년소녀어린이 팬들의 애간장을 타게 만들기 위한 작전인줄만 알았다.

애청했던 드라마 ‘질투’를 보려면 저녁 10시가 되어야 했다. 학교 마치고 돌아오면 피아노 학원 1시간 가는 것 이외에는 할일이 없었다. 동네로 나가 비석치기, 주먹야구를 하다가 더 심심해지면 연밭에서 황소개구리를 잡아 장날 내다 팔기도 했었다. 그래도 시간은 한참이었다. 집에서 코일에 구리선을 감는 부업을 하던 엄마 옆에서 불량품을 이쑤시개로 풀면서 시간을 보냈다. 늦게까지 자지 않고 버티려면 가계에 보탬이 되어야 했다.

서태지도 가고, 질투도 끝나고 나니 방학이었다. 영양 외갓댁에서 2주를 보내고 다시 집에 돌아온 나는 어느날 LP판을 하나 꺼내들었다. 갓 스무살이 된 외삼촌과 방을 같이 썼던 터라 LP판이 한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꺼낸 앨범은 015B 3집이었다. 수십 장 중에 그 앨범을 꺼낸 것은 순전히 가수 이름이 신기해서였다. 한 바퀴 돌려서 듣고 나니 한 곡을 다시 찾아 들었다. ‘수필과 자동차’. 연필인 듯한데 뭔가 있어 보이는 제목에 끌렸다.

‘우리가 이젠 없는건 옛친구만은 아닐꺼야/더 큰것을 바래도 많은 꿈마저 잊고살지/우리가 이제 잃은건 작은것만은 아닐꺼야/세월이 흘러 갈수록 소중한 것을 잊고 살잖아’라는 후렴구가 신나서 반복해 들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와닿지 않았던 당시에는 꿈, 소중한과 같은 단어가 감정이입하기 훨씬 쉬웠다. 무엇보다 ‘버스정류장’, ‘아버지’, ‘해외여행’, ‘자동차’같은 단어들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렇게 방학이 끝나고, 추위가 찾아올때쯤이었다. 걸어서 학교까지는 1시간이 걸렸기에, 버스를 타야만 했다. 전세버스였다.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시멘트 벽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머리 큰 사람들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92년 대선 포스터였다. 후에야 알았지만, 8명이 출마했는데 5번까지만 눈에 들어왔었다.

TV에는 1, 2, 3번 아저씨가 많이 나왔고, 아빠는 1번을, 엄마는 2번이 낫다고 했다. 나는 5번 아저씨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검은 뿔테가 멋져 보였고, 이름도 믿음직해 보였다. 아빠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어린 놈이 어른들 이야기 하는데 끼어들지 마라”는 구청지를 먹었다. 박찬종, 그렇지만 창원에서 열린 1번 아저씨 유세장을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국민학교 1학년 눈에는 수만 명이 모인듯 했다. 유세장에서 쩌렁쩌렁 울려퍼지던 김영삼의 목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물론, 5번 아저씨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보지 못했다. 유세장에 다녀오고서는 다시 015b의 LP를 들었다. 벽에 붙은 포스터가 없어질때쯤 아빠가 중고차 ‘르망’을 끌고오면서, 이게 다 영삼이 덕이라고 했다. 집에 자동차가 생겼으니, ‘자동차’가 들어간 노래를 다시 들어야만 했다.